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스샹달 전투 (문단 편집) === [[영국군]]의 상황 === 헤이그는 '북부 작전'에 대한 승인을 받았지만 뉴포르 일대에서의 독일군의 선제 포격과 공격으로 '북부 작전'은 연기되었고 곧 폐기되었다. 이때 헤이그는 결정적인 두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하나는 제5군 사령관 [[https://en.wikipedia.org/wiki/Hubert_Gough|후버트 고프]] 장군에게 본 공세의 핵심 역할을 맡김으로써 제5군이 공격 위치로 이동할 때까지 ‘북부 작전’ 계획의 실행을 지연시킨 것이고, 또 하나는 주공을 시작하기 전에 겔루벨트 고지대의 서부 지역 점령 작전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술 더 떠 헤이그가 구체적인 공세 계획 수립을 고프에게 맡김에 따라 영국 원정군은 재앙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고프가 세운 지나치게 야심찬 계획들은 앞서 언급한 헤이그의 실수들이 가져올 악영향을 더욱 증폭시켰다. 6월 말, 기본적으로 신속한 돌파 작전을 구상하고 있던 헤이그는 실제 공격 개시일이 다가오자, 갑자기 방향을 바꿔 일련의 제한된 공격을 순차적으로 감행하는 단계적 공세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헤이그는 군사령관들과 작전 계획에 대해 논하는 것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렇게 상하급자 간의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고프는 여전히 헤이그가 무엇보다 먼저 신속한 돌파를 원한다고 생각했다. 고프가 최종적으로 내놓은 제안은 자신이 지휘하는 제5군을 동원하여 공세 첫날에 6,000야드라는 [[서부전선]] 기준으로는 엄청난 거리[* 5.4km 정도 되는 거리, 이 거리를 굳이 쉽게 이야기하자면 솜전투 당시 영국군이 5개월 동안 엄청난 인명을 손실해 가며 전진한게 약 12km인데, 그 반의 약간 못되는 거리를 하루만에 돌파한다는 소리.]를 진격해 들어가 독일군 [[포병]]대의 주요 집결지를 지나 독일군의 제3방어선까지 진출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독일군의 저항이 약할 경우 공격 부대는 제3방어선 후방의 목표를 향해 진격을 계속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쯤에서 2, 3일 정도 공세를 중지한 후 그 틈을 이용하여 공세 나흘째에 예정된 파스샹달 능선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포병대를 전방으로 추진할 계획이었다. 헤이그는 현장 지휘관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고프는 자신의 비현실적인 계획을 그대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 헤이그는 분명 고프에게 겔루벨트 고지대를 장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주지시키기는 했지만, 고프의 계획이 고지대의 점령에 초점을 충분히 맞추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적하고 재차 겔루벨트 고지 점령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영국군은 다시 한 번 모호한 목표물들에 대한 잘못된 계획을 갖고 대규모 공세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헤이그가 선택한 지역은 공세를 펼치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장소였다. 영국군의 공격 대상 지역은 거의 대부분 독일군이 감제하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공격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독일군 [[포대]]를 제압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장기간에 걸쳐 엄청난 포격을 퍼부어야 했다. 다시 말해 제3차 이프르 전투에서 영국군은 이제 거의 구식이 되어버린 장기간의 연속 포격 전술을 다시 한 번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렸던 것이다. 한편 이프르 지역은 원래 산림과 초원으로 구성된 지역이었으나, 계속되는 전쟁의 여파로 이 일대의 배수시설이 모두 파괴되면서 철저한 진흙 수렁이 되어 있었고 이것이 '''재앙의 원인'''이 된다.[* 파스샹달 지역이 있는 플랑드르 일대는 지층의 상당부분이 진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평원에 널린 돌조차도 진흙이 굳어서 생긴 이회암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145605&cid=61234&categoryId=61234|실트]]라고 알려진 진흙보다 더 고운 입자를 가진 흙이 이프르에 잘 분포되어 있었다.] [[파일:external/www.vlib.us/3rdy.jpg]] ▲ 영국군은 이 수렁을 건너 독일군과 싸우러 가야 했다. 영국군은 2,299문의 포를 5야드에 1문씩 전개했는데, 이는 [[솜 전투]] 때 배치한 포의 10배를 넘는 수량이었다. 허버트 고프가 지휘하는 제5군은 1마일에 1개 사단을 촘촘하게 배치했으며, 근위사단과 제15[[스코틀랜드]]사단, 하이랜드 사단이 배속되어 영국 근위사단과 독일 근위사단이 대면한 이프르 북쪽 필켐과 1914년에 첫 번째 영국 원정군에 피신처를 제공했던 이프르 남쪽의 박살 난 나무 그루터기만 남은 생츄어리 숲(Sanctuary Wood) 사이에 밀집하여 정렬했다. 그리고 전투 지역에 총 508대였던 [[항공기]] 중 180대가 제5군에 할당되었다. 이들 항공기의 역할은 전선 위에서 독일군 관측 기구의 한계선인 5마일 높이까지 제공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1917년 7월 25일 헤이그가 공세 준비 완료를 발표했다. 전시 내각은 공세 내용을 재검토할 생각이었지만, 헤이그의 행동이 더 빨랐고, 전시내각에게 주어진 과업은 파스샹달 공세가 현실적인지에 대한 검토를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내각은 "전심으로 지원하겠다."란 답을 보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